욥의 세 친구는 욥의 위로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. 욥의 고난의 원인을 분석하지도 못하였습니다. 욥의 변론에 막혔습니다. 그러나 가장 연소한 엘리후가 참다 참다 분노를 터뜨렸습니다. 여러 번에 걸쳐 화를 냅니다.
[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..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](욥32:1-5)
자신은 나이가 적기 때문에 나이든 사람의 지혜를 기다렸습니다. 그러나 자신이 뜻한 대로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.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엘리후는 자기가 나서게 된 연유를 밝힙니다.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든지 [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 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내가 말을 하려야 시원할 것이라](욥32:19,20)고 합니다.
우리 사회에 이런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. 남들이 말하도록 참고 참습니다. 관료들의 말, 정치인의 말, 언론의 말, 지식인의 말, 학자의 말들을 듣고 듣습니다. 그러나 아무도 답이 되지 않습니다. 화가 난 민초의 입에서 말이 쏟아져 나옵니다. 엘리후처럼 말을 하면 시원할 것 같습니다. 말을 해서 실제로 시원하면 정말 좋겠습니다. 그런 일은 드물고, 오히려 생채기만 더할 가능성이 큽니다. 말을 하면 시원할 것 같은 생각보다,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토로하고 기도하는 것이 답답한 마음이 터질 것이라 생각되지 않습니까?